Felizes os que ouvem a Palavra de Deus

30º Domingo do Tempo Comum, Ano A

O sentido do amor a Deus com todo o coração, toda a alma e todo o entendime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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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바리사이들이 다시 등장하여 이번에도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려는 속셈을 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입을 막으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데 모인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겉보기에는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마태 22,36). 몇 줄 되지 않는 예수님의 대답에 그리스도인 삶 전체의 중심이 담겨 있습니다. 저희는 이 복음에서 묵상과 기도를 위한 다섯 가지 핵심을 골랐습니다. 복음을 다 길어 올리려는 뜻은 없으며, 성령께서 일러 주시는 다른 대목을 택하셔도 좋습니다.

늘 그렇듯 이 다섯 가지를 팟캐스트로도 나눕니다. https://youtu.be/khiDJluyNGE (각자의 언어로 된 자막이 제공됩니다.)

알려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저희가 함께 대림 시기와 성탄 시기를 위한 묵상집을 준비했습니다. 날마다 하나씩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가 담겨 있으며, 포르투갈어판이 나와 있고 팟캐스트가 번역되는 다른 언어로도 차차 나올 예정입니다. 링크: https://www.amazon.com/dp/B0HLLXGM31 .

1. 바리사이의 질문

“스승님, 율법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마태 22,36).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예수님 시대에는 여러 라삐 학파가 어떤 계명이 으뜸이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유다 전통은 모세 율법에서 613개의 계명을 헤아렸는데, 금지 계명이 365개, 적극적인 명령이 248개였고, 그 가운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은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이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한 학파의 편을 들어 다른 학파를 반대하시기를 바랐습니다. 마태오는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고 전합니다. 말꼬투리를 잡으려는 또 한 번의 시도였던 것입니다.

십계명을 둘러싼 논쟁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것이 “열 마디 말씀”이라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성경은 그 말씀들에 번호를 붙이지 않고 이어지는 본문으로 제시합니다. 어떤 이들은 첫째 계명을 “들어라, 이스라엘아” (신명 6,4)에서 보았고, 어떤 이들은 우상 금지를 포함시켰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목록을 달리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을 따릅니다. 하느님 사랑에 관한 계명이 셋,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이 일곱입니다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66항).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실 때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으십니다. 두 가지를 모두 품으시고 사랑을 중심에 두십니다.

루카 10,25-28과의 주제상 유사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거기서도 한 율법 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루카 10,29-37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에 관한 물음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하시는데, 이것만으로도 아주 풍성한 묵상이 될 것입니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2.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마태 22,37; 참조: 신명 6,5).

예수님께서는 신명기를 인용하며 시작하십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 곧 하느님 사랑이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스쳐 가는 감정이나 달콤한 것들의 자리가 아닙니다. 결정의 중심이며, 우리가 삶에서 내리는 선택의 자리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날마다의 작은 선택과 큰 선택에서 하느님을 우선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째 자리”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마다 나는 누구를 택하고 있습니까?

이 사랑에는 얼굴이 있습니다. 사람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8-29).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Dilexit nos(「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는 예수 성심의 인간적이며 신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개인 피정의 훌륭한 동반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인간적인 얼굴이시고,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십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요한 10,30).

삶을 돌아보고 양심을 성찰할 때 솔직하게 물어볼 만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셔 왔는가? 구체적인 예를 들기는 어렵지만, 단순한 질문 하나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시간을 얼마나 쓰고, 휴대전화와 소셜 미디어에는 시간을 얼마나 쓰는가? 도덕주의로 몰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어디에서 자랄 수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성당 가까이에 살면서 평일 미사에 참례할 기회가 있다면, 무엇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평일 미사는 의무가 아니지만 사랑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형제와 어머니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는 것조차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한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 안에서 만나지기 때문입니다 (참조: 마태 25,40).

3.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

“… 목숨을 다하고” (마태 22,37).

“목숨”의 바탕이 되는 히브리어 낱말은 네페쉬로, 성경의 많은 맥락에서 생명 또는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결정과 선택의 문제가 여기서 다시 나타나지만, 마음과는 다른 강조점을 갖습니다. 목숨은 하느님 앞에 선 사람 전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전자가 자동차를 몰듯이 몸을 이끄는 영혼이 아니며, 영지주의와 마니교를 비롯한 일부 이원론적 사조가 생각했듯이 몸이 영혼의 감옥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 곧 하나의 일치입니다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362-365항).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르치듯이 영혼은 몸의 형상입니다. 영혼은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이고, 몸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는 한 사람의 두 차원이며, 하느님 앞에서 셈을 치르고 육신으로 부활할 이는 사람 전체입니다.

4.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

“… 정신을 다하여” (마태 22,37).

정신은 우리의 이성, 지성, 사고입니다. 우리를 동물과 구별해 주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으로도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은 “맹신”이 아니며 이성과 대립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은 이해를 돕고, 이성은 믿음을 돕습니다. 성 안셀모는 이를 “fides quaerens intellectum”, 곧 이해를 찾는 믿음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Fides et Ratio(「믿음과 이성」)에서 믿음과 이성이 인간 정신이 진리 관상으로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공 지능이 던지는 도전에 대해서는 레오 14세 교황님의 회칙 Magnifica humanitas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오늘날에는 지능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흔히 지능이 단순히 문제를 푸는 능력과 혼동됩니다. 인간 지능의 고유한 차원은 추상화하는 능력, 곧 내일, 정의, 사랑처럼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찰로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말하는 방식과 문제 푸는 방식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이해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할 새로운 길을 찾는 데에도 지성을 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열정과 방법과 표현에서 새로운 새 복음화를 촉구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호소와 같은 방향입니다.

성 바오로는 기도하면서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읍니다. “여러분의 온 영과 영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빕니다.” (1테살 5,23). 우리가 끝기도에서 바치는 독서입니다.

5.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기

“둘째도 이와 비슷하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마태 22,39; 참조: 레위 19,18).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가 어쩌면 갈라놓고 싶었을 것을 하나로 묶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1요한 4,2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으며 (참조: 마태 22,40), 십계명은 이 이중이면서 하나인 계명의 빛으로 읽어야 합니다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55항과 2067항).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로마 13,8-10).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하여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몸짓과 행동으로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곧 육신적, 영신적 자비의 행위입니다 (참조: 마태 25,31-46;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47항).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모르는 이를 가르치고, 잘못하는 이를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삶의 역경과 우리에게 버거운 사람들을 인내로 견뎌 내는 것도 자비의 행위입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청합니다. “서로 사랑으로 참아 주십시오.” (에페 4,2). 여기서 참아 준다는 것은 말없이 견딘다는 것 이상입니다.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 곧 형제에게 “내게 기대어 올라오게” 하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각 카리스마는 예수님의 소중한 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에게는 십자가 위에서 목말라 하시는 예수님이며 (참조: 요한 19,28),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 갈증이 풀립니다. 스칼라브리니회에게는 이주민이신 예수님이며, 이집트로 가셔서 맞아 줄 사람이 필요하셨던 분입니다. 샬롬 공동체에게는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하신 분이며, 부활절 아침에 당신의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각자는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얼굴로 기도하며, 어느 경우에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길을 갑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방식

마무리하며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에 관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분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사랑의 세 가지 면모로 기도해 볼 수 있습니다.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입니다(예수님은 마음이 움직이셨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를 사랑하셨고 (참조: 요한 11,5), 최후의 만찬에서 사랑받는 제자가 당신 가슴에 머리를 기대게 하셨습니다 (참조: 요한 13,23)).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향한 연민의 사랑입니다(“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그리고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8) 하게 한 신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 (요한 3,16).

성 바오로는 아직 복음서들이 완성되지도 않았던 시대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1코린 11,1) 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어쩌면 여러분의 삶이 그날 그들이 보게 될 유일한 복음일지도 모릅니다.

기도

‘주님, 저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당신의 원수였을 때에도 저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끝없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온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여 당신을 사랑하는 은총을 청합니다. 또한 당신을 사랑하면서, 당신께서 저희 삶에 맡겨 주신 이들을 사랑하게 하시어, 작고 큰 몸짓으로 당신에 대한 저희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해 주십시오. 마리아님, 저희 손을 잡아 주시고,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이끌어 주소서.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는 대로 계속 기도하십시오 …

샬롬!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단계

거룩한 독서는 하느님 말씀을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고요한 시간을 마련하고 성령을 부른 다음, 이 복음으로 몸소 기도하면서 차분히 아래 단계를 따라가 보십시오.

1. 읽기(Lectio).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태 22,34-40을 천천히 읽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입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비슷하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2. 묵상(Meditatio). 본문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내 하루의 어떤 결정에서 하느님께서 첫자리에 계시는가? 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은 어디에서 다른 것들로 향해 있는가?

3. 기도(Oratio). 본문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무엇을 말씀드릴 것인가?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그분께서 내 길에 놓아 주신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은총을 청하십시오.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십시오.

4. 관상(Contemplatio).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새로운 시선을 주시는가?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사람들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고요히 머무르며, 그 시선이 나의 시선을 새롭게 하도록 맡기십시오.

5. 실행(Actio). 주님께서 오늘 나를 무엇으로 부르시는가? 이웃을 향한 사랑의 구체적인 몸짓 하나와 더 많은 기도 시간을 정하고, 오늘 안에 실천하십시오.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샬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짧은 영상을, 일요일에는 묵상하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주일 복음을 담은 저희 팟캐스트를 올립니다. 채널을 구독하시고 다른 분들도 초대해 주십시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도록 말입니다. “좋아요”를 눌러 주시고 친구들에게도 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샬롬!

팟캐스트 영상: https://youtu.be/khiDJluyNGE 각자의 언어로 자막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