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lizes os que ouvem a Palavra de Deus

25º Domingo do Tempo Comum, Ano A

Os primeiros e os últimos: entre a conta que fazemos e a bondade que recebe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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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와 꼴찌: 우리가 따지는 셈과 우리가 받는 선하심 사이에서

이번 연중 제25주일에 복음(마태 20,1-16ㄱ)은 포도밭 일꾼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한 밭 임자가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서 일꾼들을 사고, 아홉 시와 열두 시, 오후 세 시와 다섯 시에 다시 나갑니다. 날이 저물자 그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내주라고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이들이 투덜거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소"(마태 20,13).

이 비유는 우리의 기대 하나를 무너뜨립니다. 지난주에 (겨우)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은 베드로의 물음에서 그러하였듯이 말입니다(마태 18,21-22 참조). 우리는 셈을 기대하는데, 하느님께서는 너그러움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누구에게도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합의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의 잣대로 헤아릴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늘 그렇듯이 여러분의 묵상과 기도를 위하여 다섯 가지를 골랐고, 그것을 팟캐스트로 나눕니다. https://youtu.be/IHamHtoU5bs (여러분의 언어로 자막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1.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비유는 밭 임자에게서 시작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에게 우리의 시선이 머무르기를 바라십니다. 무엇에 관한 견줌인지는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집을 나서는 이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포도밭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로지르며 하느님의 백성과 그 백성을 향한 주님의 보살핌을 말하는 그림입니다(이사 5,1-7; 시편 80,9-16 참조).

비유에서 밭 임자는 자기 포도밭에 일꾼이 필요하기에 집을 나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풀어 쓴 말로, 그분께서는 우리가 필요하지 않으셨는데도 당신 일에 우리를 자유로이 참여시키기를 원하셨다고 흔히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06-307항 참조). 그러므로 부르심은 무엇을 생산하거나 무슨 일을 해내라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분과 함께 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사람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 부르시고, 그다음에 파견하십니다(마르 3,14 참조).

전통적인 해석 하나는 서로 다른 시간에 이루어진 이 외출들을 젊음에서 노년에 이르는 인생의 나이에 적용합니다. 다른 교부들은 그것을 구원 역사의 단계들과 여러 민족의 부르심에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는 사제 성소와 봉헌 생활의 성소에도 적용되고, 더 소박한 본당 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의자를 정돈하고, 성당을 청소하고, 필요한 일에 봉사하는 것 말입니다. 기도 생활에도 해당합니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만나러 나오십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주님을 자기 마음 안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 밖에서 살아가는 영혼을 그려 보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몸소 겪었고 그것을 자기 책 『고백록』에 남겼습니다. 그는 바깥 사물에서 하느님을 찾았는데, 하느님께서는 그의 가장 깊은 안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남았습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토록 오래되고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고백록』 10,27).

2. 이어지는 외출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마태 20,3).

이어지는 외출에서 비유는 이미 일하고 있던 이들과 여전히 장터에 서 있던 이들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 시간에야 부름받은 이들까지 말입니다. 비유가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물음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부름받아 일하고 있습니까?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 장터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까?

부르심 앞에서 핑계는 쉽게 나옵니다. 저는 노래를 못합니다, 저는 무엇 하나 준비할 줄 모릅니다, 저는 그런 일에 맞지 않습니다. 성 바오로는 몸의 그림으로 대답합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 하고 말할 수 없고, 귀가 자기는 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14-21 참조). 없어도 되는 사람은 없고, 너무 작아서 하찮은 봉사도 없습니다. 포도밭은 넓고, 저마다 제 몫을 할 자리가 있습니다.

맨 나중에 부름받은 이들은 밭 임자에게 말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20,7). 핑계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장터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한눈을 팔다가, 부르며 지나가는 밭 임자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물음이 남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우리는 귀 기울여 듣고 있습니까?

3.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는 품삯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까지 품삯을 내주시오!"(마태 20,8).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품삯을 내주는 순서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밭 임자가 맨 먼저 온 이들부터 주기 시작했다면, 그들은 제 몫을 받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선하심이 모든 이에게 보이기를 바랍니다. 비유에 나오는 데나리온은 첫 일꾼들과 미리 합의한 하루 품삯이었고,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몫에 해당하였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 바로 그 하느님께서 또한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마태 16,27; 시편 62,13; 로마 2,6 참조)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는 이 정의가 결코 훼손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아무도 합의한 것보다 적게 받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선하심이 계산을 넘어서고, 자비가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어려움은 개념에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저울로 사랑을 답니다. 내가 더 했으면 더 받아야 하고, 저 사람이 덜 했으면 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옛 정의를 다시 받아들여,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좋음을 바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신학대전』 I-II, 26문 4항 참조).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그 사람도 나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직 사랑이 아닙니다. 성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하고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돌려받으셔야 할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분의 너그러움은 온전히 대가를 바라지 않는 너그러움입니다.

4. 먼저 온 이들의 투덜거림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마태 20,11).

이 일꾼들의 결점을 판단하기 전에 그들의 좋은 점을 먼저 기억합시다. 그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났고, 일을 받아들였으며, 온종일 피로와 더위를 견디었고, 일하는 동안에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였고, 합의한 그대로 받았습니다.

결점은 마지막에 드러납니다. 투덜거림과 시기입니다. 그들은 까닭 없이 밭 임자를 불의하다고 몰아세웁니다. 다른 이들을 향한 그의 선하심이 자기들 몫에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투덜거림은 광야 시절부터 하느님의 백성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만나를 받으면서도 불평하였습니다(탈출 16,2-3; 민수 11,4-6 참조).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을 바라보는 그 순간, 자기가 받은 좋은 것을 알아보지 못하기는 쉽습니다.

여기에는 이 장면의 인간적인 면도 있습니다. 비유는 일꾼 각자의 사정을 그려 보이지 않지만, 날품으로 사는 사람은 다음 날 먹을 것을 그날 받은 품삯에 의지합니다. 시간에 비례한 품삯이었다면 오후 다섯 시에 부름받은 사람은 집으로 가져갈 것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품삯이 똑같다는 것은 일한 시간의 셈만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이들을 향한 밭 임자의 너그러움과 보살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좋으시다는 이유로 그분께 따지고 싶은 유혹도 있습니다. 욥기의 마지막 담화에서(욥 38-41 참조)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그의 고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인간의 이해 사이의 아득한 차이를 드러내시고,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을 아시는 분을 신뢰하도록 그를 부르십니다.

5.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15).

비유는 밭 임자가 이를테면 "아픈 데를 찌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시선이었습니다. 당신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자유는 제멋대로 하심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주권자이시며 또한 선하시고, 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이 거저 주심은 십자가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이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빚을 갚을 길이 없었는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로마 5,8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갚으시며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담긴 채무 증서"(콜로 2,14)를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종의 두려움을 쫓아내는 자녀의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1요한 4,18 참조). 하느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마음은 여전히 올바른 태도이며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향한 자녀다운 공경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밭 임자의 이 대답이 한 주간 우리와 함께 머무르기를 바랍니다. 시기가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을 재려고 할 때, 우리가 거저 받은 것에 감사드릴 줄 알고, 모든 이를 향한 하느님의 선하심으로 기뻐할 줄 알기를 바랍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단계

렉시오 디비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침묵의 시간을 마련하고 성령을 청한 다음, 이 단계들을 차분히 밟으며 여러분 자신이 이 복음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1. 독서(Lectio). 본문은 무엇을 말합니까?

복음 (마태 20,1-16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소.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2. 묵상(Meditatio). 본문은 나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께서는 하루의 어느 시간에 나를 부르셨고, 나는 포도밭에서 무엇을 해 왔습니까? 지금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일하고 있습니까, 장터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장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3. 기도(Oratio). 본문에서 출발하여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 살아 있고 힘이 있는 당신의 말씀으로 저희는 당신을 찬미하고 찬송합니다. 저희가 그토록 자주 깨닫지 못하는, 모든 이를 향한 당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감사드립니다. 주님, 당신께서 다른 이들에게 베푸신 좋은 것을 저희가 따져 물은 때를,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저희 잣대로 잰 때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당신과 함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저희는 이미 저희 삶의 큰 상급을 받았습니다. 받은 선물에 감사드리고, 모든 이에게 너그러우신 당신처럼 너그러워지는 은총을 주십시오. 자비의 어머니 마리아님,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4. 관상(Contemplatio).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새로운 시선을 주십니까?

하루에도 여러 번 일꾼을 찾아 나서고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품삯을 내주는 밭 임자 앞에 침묵으로 머무르십시오. 하느님을 향한 여러분의 시선이 그분께서 보여 주시는 선하심으로 바로잡히도록 맡겨 두십시오.

5. 실천(Actio). 오늘 주님께서는 나를 무엇으로 부르십니까?

이번 주간에 가정에서든 본당에서든 여러분의 공동체에서든, 아무리 작아 보이더라도 구체적인 봉사 하나를 골라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 앞에서 비교하는 대신 감사드리십시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샬롬(Shalom)!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짧은 영상을, 주일에는 여러분이 묵상하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주일 복음을 담은 팟캐스트를 올립니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도록 채널을 구독하시고 다른 분들도 초대해 주십시오. "좋아요"를 눌러 주시고 친구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샬롬!

팟캐스트 영상: https://youtu.be/IHamHtoU5bs 여러분의 언어로 선택하실 수 있는 자막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