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알려지기: 열 처녀의 비유로 드리는 다섯 가지 기도 묵상
전례력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며, 교회는 벌써 대림 시기를 준비하게 합니다. 이번 주일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로,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 가운데 첫째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탈렌트 비유(참조: 마태 25,14-30)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는 최후의 심판(참조: 마태 25,31-46)을 듣게 됩니다. 아주 잘 알려진 본문이기에, 오히려 주님께서 그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 주시도록 청해 볼 만합니다. 저희는 묵상과 기도를 위한 다섯 가지 핵심을 골랐으며, 이 본문을 다 길어 올리려는 뜻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일러 주시는 다른 대목을 택하셔도 좋습니다.
늘 그렇듯 이 다섯 가지를 팟캐스트로도 나눕니다. https://youtu.be/Cnhmxn07dis (각자의 언어로 된 자막이 제공됩니다.)
알려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저희가 함께 대림 시기와 성탄 시기를 위한 묵상집을 준비했습니다. 날마다 하나씩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가 담겨 있으며, 포르투갈어판이 나와 있고 팟캐스트가 번역되는 다른 언어로도 차차 나올 예정입니다. 링크: https://www.amazon.com/dp/B0HLLXGM31.
1.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마태 25,1).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무엇인지 설명하시려고 큰 노력을 기울이시며, 그래서 겨자씨, 누룩, 소금 같은 많은 비유를 드십니다(참조: 마태 13,31-33; 5,13). 여기서의 비유는 혼인 잔치입니다.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행렬에 속해 있습니다. 신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비유의 초점이 신랑과의 만남에 있기 때문입니다. 판관 14,12에는 이레 동안 이어지는 혼인 잔치가 나오는데, 이런 잔치가 길게 계속될 수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잔치의 단계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므로, 장면의 세부를 낱낱이 복원하려 하지 말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열 처녀는 오게 될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마태오가 사용한 그리스어는 parthenoi이며, 그래서 번역에 따라 “처녀”라고도 하고 “젊은 여인”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입니다. 이 비유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저마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하며(참조: 마태 24,36; 사도 1,7; 가톨릭 교회 교리서 673항), 비유는 신랑이 늦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신랑은 한밤중에 도착합니다(참조: 마태 25,5-6). 신랑이 더 일찍 왔더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은 부끄러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체는 준비를 시험합니다. 모두가 잠이 들지만, 신랑이 왔을 때 모두가 준비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2. 기름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 25,4).
마태오는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어리석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번역은 “신중한”과 “분별없는”을 택하기도 합니다(그리스어로 phronimai와 morai). 슬기란 미리 헤아리는 것입니다. 다섯 처녀는 신랑이 늦어질 가능성을 셈에 넣었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탑을 세우기 전이나 전쟁에 나서기 전에 먼저 계산하는 사람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도 같은 이치입니다(참조: 루카 14,28-32). 준비한다는 것은 의식적인 결단이며, 마지막 순간에 즉흥적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기름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말해 주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복음의 소여가 아니라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기름을 자비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도움에 연결하고, 교부 전통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여러 저자가 등과 기름을 행실과 사랑에 관련지어, 신앙의 빛을 켜 두는 것으로 읽습니다. 다른 저자들은 기름을 기도와 성령 안의 삶에 연결합니다. 이 모든 해석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참조: 갈라 5,6; 야고 2,17). 그리고 기도는 그 믿음을 살아 있게 하는 샘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마지막 기준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우리 삶의 저녁에 우리는 사랑에 대해 심판받을 것입니다(참조: 「사랑과 빛의 말씀」).
기도해 봅시다. 나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슬기롭게 지내고 있는가? 이 만남을 준비하려고 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그릇에는 어떤 기름이 있는가? 기도인가, 성사인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인가?
3. “안 된다”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25,8-9).
슬기로운 처녀들의 대답은 냉정해 보이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이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기심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며, 나눌 수 없는 무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인격적인 응답을 대신할 수 없고, 나를 대신하여 주님과 친교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마태 22,11-12의 혼인 예복이 떠오릅니다. 내 예복을 벗어 다른 사람에게 준다면 나는 예복이 없게 됩니다. 내가 하는 사랑의 실천은 나의 것이고, 내 기도 생활도 나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인들의 통공은 실재하며, 우리는 전구할 수 있고, 누군가의 회개를 위해 단식과 희생을 바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들어 주십니다(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953-957항). 교회는 세상을 떠난 신자들을 위한 대도를 권하고(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2항), 자비로이 대도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대사를 적용하는 것을 허락합니다(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9항).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앞서가며 떠받쳐 주고, 저마다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합니다(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993항).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응답할 수 없습니다. 초기 몇 세기에는 박해 중에 약해졌다가 순교자들의 전구에 의탁한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이 있으며, 거기에서도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납니다.
또한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살 수 있었는지를 비유가 말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경고는 엄중합니다. 지금은 자비의 때이며 은총의 때입니다(참조: 2코린 6,2). 마지막 만남에서는 심판이 있을 것이니, 하느님께서 사람마다 그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참조: 로마 2,6; 마태 25,31-46;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1-1022항). 표현은 비유의 언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말라고 진지하게 경고하시려고 이 비유를 쓰십니다.
4.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25,11-12).
이렇게 “주인님, 주인님” 하고 두 번 부르는 말이 나올 때면,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경고를 하시곤 합니다(참조: 마태 7,21-23; 루카 6,46; 13,25-27). 마태 7,22-23에서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는 이들은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열쇠는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그것은 신랑과의 친교가 없음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성경의 여러 대목에서 안다는 것은 누군가가 누구인지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가리킵니다(참조: 창세 4,1; 예레 1,5; 요한 10,14-15). 다만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에게 하신 “와서 보아라”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어디에 묵으시는지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지냈습니다(참조: 요한 1,38-39). 여기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이러한 체험, 이러한 함께 지냄이 없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분과 자주 홀로 함께 있으면서 우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로 그것입니다(참조: 「자서전」 8,5;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09항). 사랑은 시간과 함께 지냄과 앎으로 자라며, 하느님을 아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을 키웁니다.
이 함께 지냄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뵐 것이다”(마태 5,8)라고 하였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수록 그 모상으로 더욱 변화합니다(참조: 2코린 3,18). 그 순환은 선한 순환이 됩니다. 우리가 정화될수록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체험을 잘 알았습니다. “당신은 제 안에 계셨는데 저는 밖에 있었습니다”(「고백록」 10,27).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고백록」을 읽으며 이와 같은 진리를 느꼈고(참조: 「자서전」 9,8),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안에 머무시는 ‘내면의 성’에 대해 말했습니다(참조: 「영혼의 성」).
오늘 복음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아는가? 나는 그분께 알려지도록 나 자신을 맡기는가? 언젠가 우리 모두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궁극의 희망은 문을 두드렸을 때 이렇게 듣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에게 복 받은 사람들아, 와서”(마태 25,34). 그리고 깨어 있는 것을 보신 종들을 주님께서 몸소 식탁에 앉히시고 시중드시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참조: 루카 12,37).
5. “깨어 있어라”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5,13).
누군가는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열 처녀가 모두 잠들었는데(참조: 마태 25,5), 어떻게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깨어 있음은 준비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참조: 마태 24,42-44; 루카 21,36). 그리고 깨어 있음에는 기도가 따릅니다. “깨어 있고 기도하여라”(마태 26,41;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2849항).
준비한다는 것은 기름을 챙기고, 날마다 주님과의 친교를 가꾸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잠든 나를 만나시더라도, 깨어날 때 필요한 기름이 이미 내게 있다면 놀라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이고, 기름을 어디서 사는지 물으며 뛰어다닐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성사 생활과 기도는 이 준비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고해성사, 성사들, 날마다의 기도가 그러하지만, 이것들이 회개와 인내와 사랑의 실천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산만한 순간에 나를 만나실 수도 있습니다. 내 준비가 꾸준하다면 산만함이 나를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넘어진 순간에 나를 만나실 수도 있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며(참조: 잠언 24,16), 우리는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의 소박함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를 만나신다면,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또는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설거지하는 나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수녀들에게 주님께서는 냄비들 사이에도 다니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참조: 「설립의 책」 5,8). 깨어 있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삶의 매 순간을 그분 현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전례력이 끝나 가는 이 주일에 저희를 깨어 있음과 준비로 부르시니, 주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나이다.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도록 은총을 주소서. 사람들 앞에서 저희의 착한 행실이 빛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도록, 기도와 선행이라는 기름을 주소서(참조: 마태 5,16). 마태 25,31-46에서 묵상하게 될 육신적, 영신적 자비의 활동을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소서. 주님께서는 저희가 준비하도록 주시는 생명의 시간을 아시오니, 저희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한 동정 마리아의 전구로 청하오니, 저희가 주님께 알려지고 날마다 주님을 더 알게 하소서.”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대로 계속 기도하십시오…
샬롬!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단계
거룩한 독서는 하느님 말씀을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고요한 시간을 마련하고 성령을 부른 다음, 이 복음으로 몸소 기도하면서 차분히 아래 단계를 따라가 보십시오.
1. 읽기(Lectio).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태 25,1-13을 천천히 읽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2. 묵상(Meditatio). 본문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내 삶의 어떤 대목에서 나는 주님을 기다리며 슬기롭게 지내고 있는가? 내 그릇에는 어떤 기름이 있으며,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어디에서 미루고 있는가?
3. 기도(Oratio). 본문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무엇을 말씀드릴 것인가? 슬기와 깨어 있음의 은총, 그리고 주님을 알고 그분께 알려지는 은총을 청하십시오. 친구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아는 이와 이야기하듯 예수님과 이야기하십시오.
4. 관상(Contemplatio).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새로운 시선을 주시는가? 오시는 주님, 문을 두드리시며 당신 집과 당신 삶에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주님 앞에서 고요히 머무르며, 그 시선이 나의 시선을 새롭게 하도록 맡기십시오.
5. 실행(Actio). 주님께서 오늘 나를 무엇으로 부르시는가? 준비를 위한 구체적인 몸짓 하나를 정하십시오. 날마다의 기도 시간, 미루어 온 고해성사, 자비의 활동 한 가지입니다. 오늘 안에 실천하십시오.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샬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짧은 영상을, 일요일에는 묵상하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주일 복음을 담은 저희 팟캐스트를 올립니다. 채널을 구독하시고 다른 분들도 초대해 주십시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도록 말입니다. “좋아요”를 눌러 주시고 친구들에게도 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샬롬!
팟캐스트 영상: https://youtu.be/Cnhmxn07dis 각자의 언어로 자막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