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종의 비유: 자비와 정의 사이에서!
마태오 복음 18장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비유로 닫힙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형제적 교정의 의무와 함께 모여 바치는 기도의 힘을 들었습니다(마태 18,15-20 참조). 이제 구체적인 예가 나오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물음에서 태어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비유를 끝까지 듣는 사람은 흔히 분개하게 됩니다. 그 종은 갚을 수 없는 빚을 방금 탕감받고서도 작은 빚 하나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예언자 나탄이 들려준 비유 앞에서 다윗이 느낀 것과 똑같은 분노입니다. 임금은 가난한 사람의 새끼 양을 빼앗은 부자에게 격분했다가, 자기를 무너뜨리는 선고를 듣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 예수님의 비유도 우리에게 같은 일을 합니다. 우리가 그 악한 종을 마음껏 심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합니다.
늘 그렇듯이, 여러분의 묵상과 기도를 위해 다섯 가지 점을 골랐고, 그것을 팟캐스트에서 나눕니다: https://youtu.be/V8ibSPL9oo0 (여러분의 언어로 된 자막과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1.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베드로의 물음은 너그럽습니다. 이스라엘의 스승들 사이에는 세 번까지 용서한다는 전통이 있었고, 이는 예언자들의 숫자 표현(“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아모스 1,3; 2,6 참조)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 본문이 그런 규정을 세워 놓은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숫자를 두 배로 올리고 거기에 하나를 더 얹습니다. 일곱은 충만함과 이어지는 숫자이고, 의인이 넘어지는 횟수와도 같은 숫자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잠언 24,16).
베드로는 자기 스승의 마음을 잘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통의 척도를 넘어가신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앞질러 나간 것입니다. 다만 그 “넘어감”의 크기는 아직 상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어떤 번역들은 이를 “일흔일곱 번”으로 옮깁니다. 어느 쪽이든 뜻은 같습니다. 새로 셈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셈을 끝내라는 말입니다. 라멕이 일흔일곱 곱절의 복수를 노래한 자리에(창세 4,24 참조), 예수님은 척도 없는 용서를 놓으십니다. 한계를 넓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아둔 자리에서 한계를 걷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 안에는 숨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비유가 베드로 스스로 발견하게 만들 그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몇 번 용서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2. “그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끌려왔다”(마태 18,24)
이 문장의 첫 대목이 벌써 많은 것을 말합니다: 끌려왔습니다. 그 종은 스스로 나선 것이 아니라 끌려왔습니다. 어느 날 우리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셈을 하러 끌려갈 것입니다. 개별 심판과 최후의 심판에서 그렇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1-1022; 1038-1041 참조).
전례에서 읽는 번역은 “엄청난 재산”이라고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은 숫자를 밝히고, 한국어 성경도 그 숫자를 그대로 옮깁니다: 만 탈렌트. 탈렌트는 무게 단위로 약 34.2킬로그램이었고, 6,000 데나리온에 해당했습니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었으므로(마태 20,2 참조), 한 탈렌트만 해도 6,000일에 가까운 노동, 곧 16년에서 20년 사이의 세월을 뜻했습니다. 복음은 그 탈렌트가 어떤 금속이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성경들은 금 무게로 계산한 값을 각주에 실어 두는데, 그 셈을 따르면 이번 주 시세로 만 탈렌트는 약 417억 유로, 브라질 돈으로는 약 2,470억 헤알에 이릅니다. 이 환산은 추정일 뿐이며, 비유가 엄청난 재산이라고 부르는 것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주는 데에만 소용이 있습니다.
어떤 노동자도 그런 금액에 이르지 못합니다.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규모의 문제입니다. 한 사람의 노동 한 시간에는 값이 있고, 한 생애의 시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빚은 그저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이런 물음이 남습니다: 어떻게 그런 빚을 쌓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많은 것과 많은 사람을 맡고 있었으면서, 맡겨진 것을 허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생명의 값은 어떤 숫자에도 담기지 않으며, 주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마태 16,26 참조). 우리도 손에 재산을 들고 있으면서 늘 알아차리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람들, 시간, 받은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것으로 무엇을 해 왔는지, 기도 안에서 물어볼 만합니다.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대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인이 그만한 금액을 셈도 하지 않고 탕감해 준다면, 이 주인은 누구입니까?
3. 주인은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마태 18,27)
그 종은 용서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간을 청했습니다. “제게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 18,26 참조). 갚을 길이 결코 없었으니 거의 뻔뻔한 말입니다. 그래도 그는 주인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그는 청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았습니다. 임금은 이미 그와 아내와 자녀들과 가진 것을 다 팔아 빚을 갚게 하라고 명령한 상태였습니다(마태 18,25). 그런데 그는 가족의 자유를 얻고 빚이 지워진 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인이 이미 용서하기를 원하면서도 종이 와서 청하기를 기다렸다고 풀이합니다. 용서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90퍼센트만 탕감해 주었다면, 그 종은 여전히 큰 재산을 빚진 채로 평생 주인에게 묶여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할인이 아닙니다. 온전하고 무상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441; 1846-1848 참조).
4.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마태 18,28)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값 백 일분입니다. 오늘날 브라질의 하루 품값과 비교하면 15,000 헤알쯤 됩니다. 푼돈이 아니고, 과부의 렙톤 두 개도 아닙니다(마르 12,41-44 참조). 없으면 아쉬운, 실제 빚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그 종이 요구한 것은 정당했습니다. 상대는 정말로 빚을 지고 있었고, 그에게는 받아낼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없던 것은 그런 방식으로 받아낼 권리였습니다. 그 자신은 정의에 따라 대우받지 않고 자비에 따라 대우받았기 때문입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이 다시 모든 것을 정의로 재기 시작하면,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은 것입니다.
복음은 이 일이 “그가 나가서” 곧바로 일어났다고 굳이 밝힙니다(마태 18,28). 잊을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받은 용서의 기억이 멀어졌다고 말할 수 없고, 시간이 흘러 사정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5.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고문 형리들에게 넘겨졌습니다(마태 18,34)
결말은 두렵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고문 형리들에게 넘깁니다. 전례 번역은 이 말을 쓰고, 다른 번역들은 형리나 옥리라고 옮깁니다. 그리스어 낱말이 고통을 가하는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비유의 언어이며, 누구에게도 자기 형제를 그렇게 대할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지하게 경고하시려고 이 말을 쓰십니다: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분 친히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에 자기를 닫아 버립니다. 여러 그리스도인 해석자들은 이 이미지를 원한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에도 적용했습니다. 되돌아오는 생각들, 형제에게 그리고 때로는 하느님께까지 품는 앙심입니다. 그것은 끝없는 고문이며, 이미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가 지옥편 마지막 노래에 놓은 이미지를 떠올릴 만합니다: 얼음 속에 왕좌를 차지한 사탄, 홀로 떨어져 자기 안에 닫힌 채, 사람의 따뜻함이 닿지 않는 자리에 있습니다. 용서에 자기를 닫아 버린 사람의 초상입니다.
비유가 남기는 물음이 있습니다: 주인은 이미 용서하지 않았습니까? 용서했고, 복음은 그것을 두 번 말합니다. 그러나 비유는 그 종의 거부를, 자신이 받은 용서에 대한 근본적인 모순으로 제시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자비를 입고서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체험했지만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더 큰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뒤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표현은 장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카르디아, 곧 마음이라는 낱말을 쓰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주님의 기도로 바치는 바로 그 척도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마태 6,12; 가톨릭 교회 교리서 2842-2845 참조). 용서하기를 일부러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날마다 바치는 기도와 모순되고, 자기가 청하는 용서에 자기를 닫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정의나 마땅한 배상이나 필요한 신중함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빚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상처에서는 용서가 여러 번 다시 시작되는 긴 과정이며, 그 은총을 청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용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용서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용서에서 시작됩니다. 자기가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를 더 깊이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비가 무엇인지 자기 안에서 먼저 체험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이 앞에서는 시편의 물음 하나만 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시편 115(116),12)
렉시오 디비나의 단계
렉시오 디비나는 하느님 말씀을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침묵의 시간을 마련하고, 성령께 청하고, 이 단계들을 차분히 따라가면서 이 복음으로 여러분 자신이 직접 기도해 보십시오.
독서(Lectio). 본문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분의 성경에서 마태오 복음 18,21-35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히 읽으십시오. 각 장면에서 누가 행동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누가 끌고 가는지, 누가 간청하는지, 누가 용서하는지, 누가 받아내려 하는지.
묵상(Meditatio). 본문은 나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어떤 빚을 이미 탕감받았고, 어쩌면 그것을 잊고 있습니까? 내가 정의를 내세워 받아내려 하고 있는 사람이, 오늘 누군가 있습니까? 나 자신은 오직 자비로만 받았던 그것을 말입니다.
기도(Oratio). 본문에서 출발해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말합니까? 날마다 받는 용서에 감사드리고, 그것을 알아볼 은총을 청하십시오. 지금 생각에 떠오르는 그 사람을 참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도 청하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관상(Contemplatio).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새로운 시선을 주십니까? 상대가 청할 용기를 내기도 전에 빚 전체를 지워 주는 비유의 그 주인 앞에 침묵으로 머무르십시오. 그 이미지가 하느님이 누구신지 여러분에게 말하도록 하십시오.
실천(Actio). 주님께서 오늘 나를 무엇으로 부르십니까? 이번 주에 구체적인 몸짓 하나를 고르십시오: 미루어 온 대화, 한 통의 메시지, 여러분이 그냥 내려놓기로 하는 받을 몫 하나.
다음 주에 또 만납시다!
샬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짧은 영상을 올리고, 주일에는 여러분이 묵상하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주일 복음을 다룬 팟캐스트를 올립니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도록, 채널을 구독하시고 다른 분들도 초대해 주십시오. “좋아요”를 눌러 주시고 친구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샬롬!
팟캐스트 영상: https://youtu.be/V8ibSPL9oo0 여러분의 언어로 자막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