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은 이미 잔치를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손님입니까?
연중 제28주일인 오늘, 복음(마태 22,1-14)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한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마련하고 종들을 보내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제 밭으로, 어떤 이는 장사하러 가고, 나머지는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입니다. 그러자 임금은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이,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데려오게 하였고, 잔치 자리는 가득 찹니다. 그런데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는 질문을 받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여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비유는 이번 에피소드의 제목이 된 말씀으로 끝납니다. “사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아도 선택된 사람은 적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세 번째 연이은 비유입니다. 앞서 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가 있었고, 여기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초대이자 경고로 들려주십니다. 늘 그렇듯이 저희는 여러분의 묵상과 기도를 위해 다섯 가지 요점을 골랐고, 팟캐스트에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https://youtu.be/vLhfVPPJ0pE (여러분의 언어로 된 자막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다른 요점을 고르셔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마태 22,2).
첫 번째 요점은 임금 자신과 그분의 정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막대한 빚을 진 종을 탕감해 준 임금의 비유에서 임금을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마태 18,23-27 참조), 이제 그 부유하신 임금이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혼인 잔치를 치러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압니다. 초대장은 미리 보내고, 짐승을 살찌워 잡고, 상을 차려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것이 이미 마련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들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마태 22,4).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보살핌을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하시고(요한 14,2-3 참조),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쓰는데(필리 4,19 참조), 오늘 제2독서에서 읽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보살핌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거대한 식탁을 떠올려 보십시오. 손님마다 자기 자리에 이름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려고 멈춰 선 적이 있는가?
2. “혼인 잔치에 오시오!”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다 […]. 혼인 잔치에 오시오!” (마태 22,4.8 참조).
“잔치”라는 말이 이 복음에 아홉 번 나옵니다. 하늘 나라는 성경의 여러 대목에서 잔치에 비유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이 나오는 혼인 잔치(마태 25,1-13 참조), 되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잔치(루카 15,22-24 참조), 그리고 묵시록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그러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 (묵시 19,9 참조). 이사야서에서 가져온 제1독서는 이번 주일에 아주 잘 어울립니다. 지난 주일에 이사야서 5장이 포도밭에 어울렸던 것과 같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 살진 음식과 잘 익은 포도주로, 기름진 음식과 잘 거른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이사 25,6). 화답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내 원수들 앞에서 나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시편 23[22],5 참조).
이 잔치에는 두 때가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체성사의 잔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원한다면 날마다 미사 안에서 누립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는 하늘 영광의 앞맛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CIC) 1402 참조). 완전한 잔치는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한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1코린 2,9 참조). 하늘의 잔치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리라” (이사 25,8 참조).
이로써 하늘나라가 지루한 곳이어서, 천사들이 구름에 앉아 하프나 켜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라집니다. 잔치는 결코 시시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갈망에 응답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으며(CIC 27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저희를 당신을 위해 만드셨기에,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평온을 찾지 못합니다”(『고백록』 I,1,1). 우리는 정의와 아름다움, 끝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허기를 느끼고, 이 갈망은 그것을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을 가리킵니다. 시편 42편처럼 “제 영혼이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시편 42,3 참조). 게다가 하늘에서는 우리의 호기심도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끝없이 알아 갈 것이고, 저마다 그분에게서 발견한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펠리피가 떠올린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기분이 안 좋은 사람에게 잔치는 가장 있기 힘든 자리입니다. 모두가 행복해하고 큰 소리로 떠들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그곳에서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할 것입니다. 좋은 기도 주제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다른 이들의 좋은 일을 함께 기뻐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가?
3. 손님들: 무관심한 이, 적대적인 이, 폭력적인 이, 그리고 준비하지 않은 이
“초대받은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제 밭으로,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가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는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마태 22,5-6).
손님들의 응답은 비유의 중심입니다. 처음에 초대받은 이들은 세 부류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다른 데 두는 무관심한 이들(밭, 장사), 보내진 이들을 붙잡아 때리는 적대적인 이들, 그리고 죽이기까지 하는 폭력적인 이들입니다. 예언자들도 이미 그렇게 취급받았고, 임금의 종들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마태 23,37 참조). 이들은 잔치를 거부하였으므로 그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마태 22,8).
그러나 임금은 잔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이,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데려오라고 하고, 잔치 자리는 가득 찹니다. 이렇게 부름받은 이들은 초대받으리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갔습니다. 이는 이 시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그물의 비유처럼 온갖 사람이 있습니다(마태 13,24-30.47-50 참조).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가 필요하며(CIC 827 참조), 최종적인 가름은 마지막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남은 이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입니다. 그가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미리 안내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수도 있고, 무심코 왔을 수도 있습니다. 임금은 그를 “친구여”라고 부르며 묻습니다. “그대는 혼인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잔치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알맞은 예복을 입고 들어와야 합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이 예복을 사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상기시키신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해석에 따르면, 혼인 예복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묵시록은 이 모습으로 기도하도록 도와줍니다. 신부가 입은 깨끗한 모시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이며(묵시 19,8 참조), 어린양의 피에 옷을 빨아 희게 한 이들이 어좌 앞에 서 있습니다(묵시 7,14 참조). “주님, 주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7,21 참조). 또한 용서받지 않은 채 하느님 백성 한가운데에 있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구약의 파스카 때 문설주에 발려 맏아들들이 화를 면하게 한 어린양의 피(탈출 12,7.13 참조)가 이제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이를 위하여 흘려졌으며, 우리는 겸손하게 그 피 아래에 우리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늘 찾는 것이 좋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의 몫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너를 너 없이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너 없이 너를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설교집』 169,11,13; CIC 1847 참조). 우리는 우리의 응답을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걸어가도록 미리 마련해 주신 선행이 바로 그것입니다(에페 2,10 참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수녀들에게 주님께서는 행실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니 질문은 개인적입니다. 나는 어떤 손님인가? 무관심한가, 적대적인가, 아니면 잔치에 들어왔으면서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인가? 하느님의 응답에는 네 번째 선택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4.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2,13).
이것은 비유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입니다. 손과 발을 묶는 것은 달아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가장 위험한 죄수들에게 발에도 수갑을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빛의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고,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어둠은 빛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죄와 죽음을 말합니다(요한 1,5 참조). “울며 이를 갈 것이다”는 최종적인 상실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표현입니다.
어떤 이들은 왜 그렇게 지옥 이야기를 많이 하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성경은 천국과 하늘 나라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지옥에 대해서도 말하며, 교리서는 예수님께서 “게헨나”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CIC 1034 참조). 교회는 언제나 마지막 현실, 곧 죽음, 죽은 직후의 사심판, 세상 끝의 최후 심판, 지옥과 천국을 가르쳐 왔습니다(CIC 988-1065 참조). 지옥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덮어 두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바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예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지옥에 떨어지려면 하느님에 대한 자발적인 외면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끝까지 고집해야 합니다(CIC 1037 참조). 지옥에 던지는 분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각자가 의롭고 완전하신 심판자 앞에서 응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와 우리 자유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는 절박한 호소이지(CIC 1036 참조), 사람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의 이유가 아닙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 삶에서 가장 큰 은총 가운데 하나가 지옥에서 당신에게 마련되어 있었을 자리를 본 것이라고 하였고, 그것으로 회개가 얼마나 절박한지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자서전』 32 참조).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하신 비유의 세 주일은 같은 호소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마음이 움직여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오늘 그 호소가 우리에게 옵니다.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늘 심판이 닥친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입고 있는가?
5. “부름받은 사람은 많아도 선택된 사람은 적다”
“사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아도 선택된 사람은 적다” (마태 22,14).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운의 문제인 것처럼, 곧 “안됐지만 나는 선택되지 못했어”라는 식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런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부르심은 모든 이를 위한 것으로, 무리 전체를 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시며”(1티모 2,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CIC 605 참조). 누군가 예수님께 구원받는 이가 적으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숫자로 답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시오” (루카 13,23-24 참조).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이것이 됩니다. 나는 응답하는 이들 가운데 있는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를 선택하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예수님은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셨습니다”(마르 3,13).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헤아릴 수 없지만, 응답을 요구합니다. 그분은 유다를 부르셨는데, 그는 부르심을 받고도 그분을 배반한 “멸망의 자식”(요한 17,12)이 되었고, 부유한 젊은이도 부르셨는데 그는 그분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마태 19,21-22 참조). 잔치를 거부하는 이들은 스스로 배제되는 것이며, “내 잘못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으니까”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이를 부르셨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과 친밀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모른다” (마태 7,23 참조). 성경적 의미에서 안다는 것은 친밀하다는 것, 곧 그분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친밀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말씀하십니다. “배고플 때에 너희는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마태 25,31-46 참조).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를 연 질문이 다시 나옵니다.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구제를 한 것은 언제입니까? 구제는 큰 비용이 들지 않으며 자비의 행위입니다(CIC 2447 참조). 주는 사람은 자기 몫을 다한 것이고, 받은 사람이 자기 자유로 무엇을 하는지는 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각 신자가 자기 형편에 따라 해야 할 의무입니다(CIC 2043 참조). 교회도 전기 요금을 내야 하며, 기부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응답하고 운영하는 사람은 회계 보고로 책임을 집니다.
이방인을 맞아들이는 일도 여기에 속합니다. 고아와 이방인과 과부는 구약 시대부터 하느님께서 보호하라고 명하신 세 부류입니다(신명 10,18-19; 탈출 22,20-22 참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주었다” (마태 25,35). 펠리피는 2015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유럽의 공동체들에 난민을 받아들이라고 호소하신 일과, 시리아에서 온 그리스도인 난민 가족을 맞아들인 빈의 자기 본당의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세상의 문제를 이민자들의 탓으로 돌리기는 쉽지만, 말씀은 환대를 요구합니다.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단계
거룩한 독서는 하느님 말씀을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침묵의 시간을 마련하고, 성령을 청하고, 차분하게 이 단계들을 따라가며 이 복음과 함께 직접 기도하십시오.
1. 독서(Lectio). 본문은 무엇을 말합니까?
복음 (마태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다시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여라.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들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혼인 잔치에 오시오.’ 그러나 그들은 무시해 버리고, 어떤 자는 제 밭으로,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가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는 임금의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런 다음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거리의 길목으로 나가 아무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한길로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혼인 잔치 자리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아도 선택된 사람은 적다.””
2. 묵상(Meditatio). 본문은 나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것, 곧 성체성사 안에서 이미 시작된 잔치와 하늘에서 나를 기다리는 잔치에 대해 감사드린 적이 있는가? 나는 어떤 손님이었는가? 내 밭과 내 장사에 너무 바빠 무관심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준비도 없이 잔치에 온 사람이었는가? 나는 그리스도와 사랑의 행실을 입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구제를 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맞아들인 것은 언제였는가?
3. 기도(Oratio). 본문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무엇을 말씀드립니까?
‘주님, 저희를 위해 마련해 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만찬과 잔치, 잔칫상에 있는 저희 자리, 그리고 아버지 집의 많은 거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저희의 비참함과 주님의 자비를 알아보는 은총을 주시어, 주님의 피로 빤 저희 옷이 저희가 흠 없이 나아갈 수 있게 하소서. 고해성사를 늘 찾고, 주님 곁에 머물고, 기도 생활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삶을 지켜 나가는 은총을 주시어, 저희가 주님을 닮고 주님과 친밀해지게 하소서. 평화의 모후 마리아님,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이끄시어 주님 아드님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성령께 이끌려 여러분의 기도를 이어 가십시오.
4. 관상(Contemplatio).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새로운 시선을 주십니까?
그토록 정성스럽게 잔치를 마련하시고 여러분을 “친구”라고 이름으로 부르시는 임금님 앞에서 침묵 속에 머무르십시오.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손님으로 가득 찬 잔치 자리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자비로 바라보시도록 자신을 맡기며, 이 초대에 응답할 은총을 청하십시오.
5. 실천(Actio). 오늘 주님께서는 나를 어디로 부르십니까?
이번 주에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구제를 하거나, 공동체나 본당을 돕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고해성사를 보지 않았다면 고해성사 일정을 잡으십시오.
다음 주에 또 만나요!
샬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짧은 영상을, 주일에는 여러분이 묵상하고 기도하실 수 있도록 주일 복음을 다룬 팟캐스트를 준비합니다. 채널을 구독하고 다른 분들도 초대하셔서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좋아요”를 눌러 주시고 친구분들께 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강복하시기를 빕니다. 샬롬!
팟캐스트 영상: https://youtu.be/vLhfVPPJ0pE 여러분의 언어로 선택하실 수 있는 자막이 함께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