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느냐? 말과 회개 사이에서
연중 제26주일인 오늘, 복음(마태 21,28-32)은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이릅니다.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마태 21,31).
이는 또 한 번 회개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시고, 복음은 강한 말씀으로 끝납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 21,32).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이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실 때, 그 물음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혹시 우리가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엄하게 말씀하실 때조차, 그 엄함은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지 결코 단죄하거나 멀리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회개의 필요성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나처럼 여러분의 묵상과 기도를 위해 다섯 가지 요점을 골라 팟캐스트에서 나누었습니다: https://youtu.be/x88PbSVA320 (여러분의 언어로 된 자막이 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마태 21,28).
오늘 복음이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20장의 포도밭 일꾼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마태 20,1-16ㄱ 참조). 2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합니다(마태 21,1-11 참조).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시고(마태 21,12-13 참조), 도성을 떠나시며, 무화과나무 사건이 일어납니다(마태 21,18-22 참조).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따져 묻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마태 21,25). 그들은 서로 의논하다가 군중이 두려워 입장을 밝히지 않기로 합니다. "모르겠소" (마태 21,25-27).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거의 다정하기까지 한 어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치 자, 그럼 짧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마, 하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상황을 판단하게 하시고,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의 행실을 판단하게 하십니다.
매일 미사 독서는 참 좋고 실용적이지만, 복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면 성경을 알고 성경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요한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고, 요한에 대한 말씀으로 끝맺으실 것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난데없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은 곧바로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루카 15,11-32 참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지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저 "첫째"와 "다른 아들"이라고만 하십니다. 교부들의 한 해석은 이 두 아들에게서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봅니다. 몇몇 교부는 첫째와 둘째의 순서를 뒤바꾸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포도밭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이었습니다(이사 5,1-7 참조).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을 "참포도나무"로, 아버지를 농부로 소개하시며(요한 15,1 이하 참조), 포도밭은 하느님 나라를 가리키게도 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포도밭 일꾼들, 오늘은 포도밭으로 부름받은 아들들, 다음 주일에는 소작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라는 포도밭의 일꾼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마태 9,37).
이 그림 안에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도 늘 첫째 아들이거나 늘 둘째 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두 아들의 모습이 다 있고, 제 몫의 유산을 청한 아들과 밖에 서서 투덜거린 큰아들의 모습도 있습니다(루카 15,12.28-30 참조). 가장 큰 위험은 꼿꼿이 서서 저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감사드리는 바리사이처럼 되는 것입니다(루카 18,11 참조). 조심하십시오. 바로 여러분이 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리처럼 기도하는 것이 언제나 중요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싫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마태 21,29).
"생각을 바꾸어"는 전례 성경의 번역이고, 다른 번역들은 "뉘우치고"라고 옮깁니다. 그리스어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쓰시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마태 21,32)와 같은 동사, 곧 metamélomai로서, 뉘우치다, 생각을 바꾸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신약 성경이 회개를 가리킬 때 쓰는 또 다른 낱말 metanoia와 가까운 친척인데, 이 낱말은 변화, 사고방식의 전환으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이 아들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며, 세례자 요한도 이미 회개를 선포하였습니다(마태 3,2 참조).
여기에는 우리의 뜻과 하느님의 뜻의 일치를 비추어 주는 빛이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저서 "영혼의 성"의 제5궁방에서 이 일치에 대해 말합니다. 의지의 일치란 내 뜻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 좋든 싫든, 쉽든 어렵든 그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주 큰 도전으로 다가오고, 우리의 육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이 아들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입은 싫다고 했지만, 행동은 다른 것을 말했습니다.
본문은 그가 얼마나 지난 뒤에 뉘우쳤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고 회개하게 할까요? 적어도 네 가지 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 논증,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요한 13,8-9). 성 바오로는 묻습니다.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 10,14).
둘째는 시련입니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니네베로 보내어 설교하게 하셨지만, 그는 반대쪽으로 달아났습니다(요나 1,1-3 참조). 폭풍이 일고 큰 물고기가 나타났으며, 요나는 그 배 속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지냈고(요나 2,1 참조), 결국 니네베로 갔습니다(요나 3,1-3 참조). 때로는 시련이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이끕니다.
셋째는 하느님 체험입니다. 수많은 성인이 그러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산 다미아노 십자가 앞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렇습니다.
넷째는 은총의 손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오랜 저항 끝에 그 손길을 느끼고 결심하였습니다. 바로 지금, 바로 오늘이다(고백록 VIII,12 참조).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도 1886년 성탄 밤에 있었던 비슷한 일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지친 듯 한마디 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는 또다시 울며 소란을 피울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르게 결심하였습니다. 눈물을 닦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버지와 언니들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곧바로 좋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보다 강했고, 은총을 받아들였으며, 몇 분 만에 성숙해졌습니다(원고 A, 44v-45r 참조). 어쩌면 여러분도 이러한 길 가운데 하나로 회개를 체험하였을지 모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1897년의 한 시에서 처음 보기에는 이상하게 들리는 말을 합니다. "나는 언제나 내 뜻대로 합니다" (시 45, "나의 기쁨"). 그녀는 같은 시에서 자신의 기쁨은 예수님의 뜻을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녀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어 있었기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자기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가겠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가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마태 21,30).
지켜지지 않은 이 "가겠습니다"라는 대답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그리고 곧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분께서 선언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마태 7,22-23).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 요한은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요한 3,18). 성 야고보도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은 사람을 설득하지만, 본보기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이러한 일관성을 누구보다 온전히 사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아무도 그분께 죄가 있다고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요한 8,46 참조). 그분께서는 말씀하시고 몸소 본을 보이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입으로만 말하는 것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말은 적게 하더라도 실천하는 사람은 큰 차이를 만듭니다.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는 설교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분의 연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분이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행하였는지! 저마다 자기 사명과 부르심이 있지만, 말만 많은 것은 위험합니다. 여기서 이 질문을 우리 자신의 Lectio로 가져가 봅시다. 나는 "주님, 주님!" 하고 말만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도, 그들이 말만 하고 자기가 가르친 것을 실행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마태 23,3 참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회개가 없음을 고발하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마태 15,11.18). 예언자들도 이미 말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이사 29,13; 마태 15,8 참조). 자비에 관한 세 비유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었다는 말로 시작하는 루카 복음 15장처럼(루카 15,1 참조),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의식하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격이 있다고 여기며 남들 위에 올라설 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내가 설교하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동정 마리아는 둘째 아들과 정반대의 본보기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하고 말씀하신 뒤, 곧 서둘러 길을 떠나 친척 엘리사벳을 섬기러 가셨습니다(루카 1,39 참조). 한 여인이 예수님을 품었던 태가 행복하다고 외치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이것이 우리 채널의 이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행복합니다"이며, 그 뒤를 잇는 말이 바로 말씀을 지키는 것, 곧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마태 21,31).
이것이 핵심 질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대답하는 이들은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입니다. 최고 의회에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함께 있었고, 두 무리는 예컨대 부활에 대해 생각이 크게 달랐습니다(사도 23,6-8 참조). 이제 그들은 처음의 질문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답하면서, 예수님께서 기대하신 대로 정확히 걸려듭니다. "맏아들입니다". 옳은 대답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 21,31).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마태 21,25-27 참조). 그런데 이제 그들 스스로,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이 "모르겠소"라는 대답에서 우리는 입장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믿기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른 질문들에서 쓰시는 것과 같은 가르침의 방식입니다. 당신을 집에 맞아들인 바리사이 시몬에게 예수님께서는 두 채무자 가운데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시고, 시몬은 대답합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카 7,43). 그 죄 많은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을 드러낸" 것입니다(루카 7,47 참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뒤에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6-37). 그저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그리고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1베드 4,8). 율법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는 마치 규칙이 누군가를 구원해 줄 것처럼 규칙에 규칙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진짜 가톨릭 신자라면 이것도 안 하고, 저것도 안 한다'. 내가 하는 일이나 하지 않는 일은 내 안에 있는 것의 반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3 참조). 회개는 안에서 밖으로 나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허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십니다(마태 18,35).
그리고 나는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의 죄만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편과 함께 기도합니다.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시편 51,5-6).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겸손은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영혼의 성, 제6궁방 10,7 참조). 이 말은 흔히 잘못 이해되어, 마치 진리가 내 학위나 직함인 것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진리는, 내가 죄인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으며,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내 자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 자신도 지옥에 자신을 위해 마련되어 있던 자리를 본 환시를 묘사하면서, 그것이 "주님께서 제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 가운데 하나"였다고 씁니다(자서전 32,4). 그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자신을 무엇에서 구해 주셨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탈혼과 수많은 특별한 은총을 받았지만, 그녀는 이것을 가장 큰 은혜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영적 위로를 자랑하는 사람은 큰 위험에 빠진다고 경고합니다(어둔 밤 I,2 참조).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듭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 21,32).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구절입니다. 회개는 믿음을 향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복음서도 이 믿음의 문제로 끝을 맺습니다. 표징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20,31).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그토록 많은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의 강력한 표징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리와 창녀들의 회개입니다. 그 회개를 보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믿지 않을 이유를 늘 수없이 찾아냈습니다.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갔을 때, 세리들은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대답하였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루카 3,12-13). 그들은 여전히 세리였지만, 회개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신 이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은 여전히 마음이 굳어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이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든, 굳은 마음 앞에서는 기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누구의 굳은 마음도 우리가 이겨 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여러 해 동안 끈기 있게 기도한 성녀 모니카의 전구를 청할 수 있습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며 끈질기게 기도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 11,13).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루카 11,11). 가장 큰 은총은 성령을 청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청원마저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좋다고 여기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이며 참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로마 8,26-27 참조).
Lectio Divina의 단계
Lectio Divina는 하느님 말씀을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침묵의 시간을 마련하고 성령께 도움을 청한 뒤, 이 단계들을 차분히 따라가며 이 복음으로 직접 기도해 보십시오.
독서 (Lectio). 본문은 무엇을 말합니까?
복음 (마태 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묵상 (Meditatio). 본문은 나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언제 싫다고 하고 나중에 가는 첫째 아들입니까? 그리고 언제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가지 않는 둘째 아들입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어떤 길로 나를 회개시키셨습니까? 말씀, 시련, 하느님 체험, 은총의 손길 가운데 무엇이었습니까?
기도 (Oratio). 본문에서 출발하여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말씀드립니까?
'주님, 오늘 저희는 이 은총을 청합니다. 저희의 말이나 겉모습이나 느낌이 주님의 뜻을 거부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행할 굳셈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저희가 주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얼마나 없는지, 또 주님께서 저희에게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깨닫는 은총을 주십시오. 예수님, 주님께서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가엾이 여기시는지, 저희를 위해 얼마나 큰 용서를 품고 계신지 보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희도 주님의 사랑과 연민과 용서로 가득 차, 사랑하고 용서하며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저희 자신을 자기 비하로 바라보지 않고 진리 안에서 바라보는 은총을 주십시오. 저희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지만, 주님의 사랑 덕분에 사랑받고 아낌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저희 손을 잡아 주시고,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시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기도를 이어 가십시오.
관상 (Contemplatio).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새로운 시선을 주십니까?
같은 인내로 두 아들에게 당신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청하시는 아버지 앞에 침묵 중에 머무르십시오. 나중에 뉘우치는 여러분의 "싫습니다"와 지켜지지 않은 여러분의 "가겠습니다"를 그분께서 바라보시게 하고, 그분의 자비가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맡겨 드리십시오.
실천 (Actio). 주님께서는 오늘 나를 무엇으로 부르십니까?
주님께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아직 하지 않은 일 하나를 골라, 이번 주에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이 굳은 누군가를 위해 날마다 기도하며, 그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청하십시오.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샬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짧은 영상을, 주일에는 여러분이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주일 복음을 다루는 팟캐스트를 올립니다. 채널을 구독하시고 다른 이들도 초대해 주십시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도록 말입니다. "좋아요"를 누르시고 친구들에게도 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샬롬!
팟캐스트 영상: https://youtu.be/x88PbSVA320 여러분의 언어로 자막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